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대서양 조약 기구 (문단 편집) === 탈냉전 === 1990년대 초에 냉전은 끝났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1991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냉전이 끝나가면서 [[동독]]이 소멸하고 [[독일]]이 [[독일 재통일|통일될 때]], 미국과 소련은 NATO의 영역을 당시(1990년 수준)에서 확장하지 않는다는, 명문화되지 않은 약속을 했다.[[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europe/2022/01/11/3MD5EFCDFVHR3KMRO2KBJBXYOE/|관련 기사]] 그러나 이와는 달리 NATO는 동유럽으로 확장되었다. 미국이 처음부터 NATO 확장에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임기 초인 1993년 6월 10일 NATO 외무장관들과 개최된 회의에서 미국의 대표로 나온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는 "언젠가 적절한 시기에 나토를 확장시킬 수는 있지만 현재의 의제는 아니다("In appropriate time, we may choose to enlarge NATO membership. But this is not now on the agenda.”)라면서 나토의 확장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나토의 확장보다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 나토의 확장은 자동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나토와 러시아간 완충지대(buffer)로 설정시키는데 이로 인하여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994년 1월 11일에 개최된 백악관 각료들과 중부 유럽 외무장관들과의 회의에서, 러시아의 팽창에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외무장관이 나토에 즉각적으로 가입하고 싶다고 요청하였지만 백악관 각료들은 이에 대해 러시아가 개혁에 성공해서 좋은 곰(good bear)이 될지, 아니면 팽창주의적인 나쁜 곰(bad bear)이 될지 지켜보자'면서 이들 국가의 나토 가입 요구를 거절하였다[[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209776|#]]. 그러나 미국은 입장을 바꾸고 NATO를 동유럽으로 확장했다. 빌 클린턴 정부가 나토 확장론으로 급격히 기울게 된 원인으로는 다음이 있다. *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역사적으로 러시아에 호되게 당한 [[동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해서 엄청난 염증을 느끼며 끈질기게 NATO가입을 요구했다. 이들 나라가 소련-러시아에 원한을 가지게 된 계기는 큰 사건만 대충 살펴봐도 [[카틴 학살]], [[발트 3국 침공]], [[프라하의 봄]], [[부다페스트 공방전]], [[헝가리 혁명]] 같은 것들이 있다. * [[보스니아 전쟁]]처럼 NATO가 아닌 나라에서 전쟁과 대량학살 사태가 벌어졌을 때 미국과 NATO가 무력하게 아무런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없었다. * 소련이 무너지고 세워진 [[러시아 연방]]의 혼란도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체첸 전쟁]]처럼 러시아와 그 주변국과의 갈등이 현실화되었는데 러시아가 이 갈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또한 1993년 12월 거행된 러시아 총선거에서 러시아 극우주의 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최대 의석을 차지했다. * 1994년 12월 실시된 [[미국 상원]], [[미국 하원|하원]] 선거에서 나토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던 [[공화당(미국)|공화당]]이 상원과 하원을 싹쓸이함으로써 나토 확장 정책을 펼치는 것은 미국 국내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https://direct.mit.edu/isec/article-abstract/44/1/7/12232/How-to-Enlarge-NATO-The-Debate-inside-the-Clinton?redirectedFrom=fulltext|#]] 이런 미국의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했던 것은 [[독일]]의 수상 [[헬무트 콜]]이었다. 재밌는 점은 헬무트 콜 역시 처음에는 나토 확장론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94년 1월 개최된 나토 회의에서 헬무트 콜은 "동유럽국들에게 지원은 해줄 수 있지만 나토 가입은 허용할 수는 없다"면서 공개적으로 나토 확장에 반대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 이유는 다음이 있다.[[https://www.aicgs.org/2020/07/helmut-kohl-and-nato-enlargement-the-search-for-the-post-cold-war-order/#_ftnref5|#]] *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한 대량 인종학살과 그로 인한 난민 발생이 독일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도 보스니아 난민이 쏟아졌기 때문. 1994년 12월 5일 헬무트 콜과 빌 클린턴 사이의 진행된 회담에 따르면 [[보스니아 전쟁]] 등 유고슬라비아에서 촉발된 분쟁과 민족학살로 인하여 독일에는 이미 40만명의 난민이 온 상태였다고 한다. [[https://clinton.presidentiallibraries.us/items/show/101377|#]] * 콜은 친서방파인 당시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헬무트 콜이 빌 클린턴과의 회담에서 얘기한 에피소드로, 러시아가 분쟁중인 국가에 폭격을 계속하자 헬무트 콜은 보리스 옐친에게 전화를 걸어 폭격을 중지하라고 요청한다. 보리스 옐친은 이에 응하여 폭격을 당장 멈추었지만 24시간이 지나자 폭격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때 헬무트 콜은 보리스 옐친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 군부가 보리스 옐친의 통제를 점차 이탈하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고 생각했다.[[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209782.pdf?v=ba37eebcf8184fc72b3407f32b859e4a|#]] 그리하여 헬무트 콜 역시 빌 클린턴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나토 동진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99년 3월(체코, 헝가리, 폴란드)과 2004년 3월(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두 차례에 걸쳐 구 동구권 국가들이 NATO에 합류했다[* 아울러 이들은 NATO의 상대격이던 [[바르샤바 조약 기구]] 출신들이기도 하다.]. 2009년에는 [[크로아티아]]와 [[알바니아]]가 NATO에 가입했으며, 2017년 [[몬테네그로]], 2020년에 [[북마케도니아]]가 NATO에 가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